국수 한 그릇

한빛일보 류경희 논설위원

  2005년 8월 23일

1997년 2월, 일본 국회의 예산심의 위원회 회의실에서 질문에 나선 공명당의 오쿠보의원은 대 정부질문 중 돌연히 동화 한 편을 꺼내 읽는다.

그의 돌발행동에 어이없어 하며 장관과 의원들은 오쿠보의 낭독을 듣게 되었는데, 이야기가 중반으로 접어들자 손수건을 꺼내는 사람들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하더니 이야기가 끝날 무렵에는 회의실 전체가 거의 통곡 수준인 울음바다로 변했다.

정책과 파벌을 모두 초월하여 한마음으로 눈물을 보였던 동화가 바로 구리료 헤이의 ‘우동 한 그릇’이다. 울지 않고 배겨낼 수 있는가를 시험하기 위해서라도 한 번 읽어보라고 일본경제신문이 자신있게 추천한 이 작품은 그 후 일본을 넘어 전 세계로까지 감동을 확산시켰다.

마음을 든든하게 하는 음식

일본 삿뽀로에서는 섣달 그믐의 풍습인 해 넘기기 우동을 먹은 후,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첫 참배를 가는 것이 관례다.

어느 해 섣달 그믐날 밤, 우동집 ‘북해정’이 영업을 끝내고 막 문을 닫으려는데 남루한 차림의 한 여인과 두 남자아이가 머뭇거리며 우동 한 그릇을 주문한다. 주인 부부는 귀찮은 내색 없이 밝은 목소리로 주문을 받고 몰래 세 사람이 먹을 만큼의 사리를 더 얹어 준다.

다음해 섣달 그믐날도 이 세 모자는 같은 시간 우동집에 들러 우동 한 그릇을 나누어 먹는다. 삼 년째 되는 해, 북해정 주인부부는 메뉴판 가격을 일부러 낮춰 놓고 예약석을 마련해 놓은 후 세 모자를 기다린다.

세 모자는 이번에는 우동 두 그릇을 시키고,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남긴 빚 때문에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노력하여 그 빚을 다 갚게 되었다는 그간의 사정과 함께 주인 부부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꺼내놓는다.

셋이서 한 그릇 밖에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고맙습니다, 새해엔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한 인사가 “지지 말아라, 힘내, 살아갈 수 있어” 라는 격려로 들렸다며 세모자는 나누어 먹은 우동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었다고 고마워 한다. 그래서 손님에게 “힘내라, 행복해라”하는 속마음을 “고맙습니다”로 말해주는 일본 제일의 우동집 주인이 장래 희망이 되었다는 아이의 말에 주인 부부는 참을 수 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는다.

그 다음 해부터 몇 년 동안 세 모자는 우동집을 찾지 않았지만 주인 부부는 매 해 섣달 그믐날이면 그들이 앉았던 2번 테이블을 예약석으로 비워두었고,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손님들에게도 알려진다.

십 수년이 지난 섣달 그믐날 북해정 문으로 한 부인과 청년 두 명이 들어왔다. 자신들이 예전 일 인분의 우동을 주문했던 사람들이라고 하며 의사와 은행원으로 성공한 두 아들과 어머니는 우동 세 그릇을 주문한다.

구리료 헤이의 동화 속 ‘우동 한 그릇’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다. 그것은 한 그릇에 넘치게 담은 따뜻한 격려이며 사랑이었다.

동화 우동 한 그릇은 만들어 진 이야기지만 픽션보다 더 진한 사랑의 국수를 말아 내는 국수집이 우리 주위에 있다.

국수 한 그릇에 담긴 사랑과 격려

인천 동구 화수동에 ‘민들레 국수집’이라는 3평 남짓한 작은 국수집이 그 곳인데, 몇 명이 겨우 앉을 수 있는 식탁이 하나 놓여 있는 이 국수집에서 하루에 150여명의 극빈자들이 무료식사를 한다.

25년 동안 수도원에서 수사로 생활하다 환속한 주인 서영남씨는 그저 배고픈 분들에게 따뜻한 국수 한 그릇 대접하고픈 마음으로 이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민들레 홀씨가 퍼져 새로운 민들레가 피어나듯이 민들레 국수집 2호점, 3호점이 전국 각지로 퍼져나가면 좋겠다는 것이 유일한 바람인 그는 환속을 했다하지만 누구보다 더 고귀한 사제로 보인다.

세속에 섞인 사제가 국수를 마는 초라한 국수집은 어느 성전보다도 빛나는 성전이다.

몸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이런 이들이 있어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국수 한 그릇에 담긴 고귀한 희생에 머리가 숙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