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에 가진 것이라곤 300만 원뿐이었습니다. 식탁 하나 놓고 국수를 삶았습니다. 겁도 없이 그렇게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고 놀라운 일들의 연속이었습니다. 10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나이 육십이 넘어 필리핀에서 또다시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필리핀에는 너무도 배고픈 사람들이 많아서 민들레 국수집을 시작하면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밥 달라고 할 텐데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느냐며 모두 말렸습니다. - '여는 글' 중에서
"차린 것이 없지만 맛있게 드십시오"
2003년 4월 1일 단돈 300만 원으로 시작한 '민들레 국수집'이 문을 연 지 13년이 지났다. 민들레 국수집의 사랑 홀씨는 여기저기로 바람 타고 날아가 국수집이 자리잡고 있는 인천 화수동에 '민들레 마을'을 이루기에 이르렀다. 현재 민들레꿈 어린이공부방, 민들레꿈 어린이밥집, 민들레책들레 도서관, 민들레희망센터, 민들레 진료소, 민들레 가게를 운영 중이다. 2014년에는 필리핀으로 건너가 가난한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나보타스, 말라본, 칼로오칸 세 곳에 필리핀 민들레 국수집을 열었다. 필리핀 다문화가족모임, 필리핀 엄마들을 위한 한글교실도 열고 있다.
이렇게 우리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만드는 주인공은 바로 서영남 대표이다. 그는 1976년 천주교 한국순교복자수도회에 입회해 25년간 수사修士로 지냈다. 1995년부터 전국의 교도소로 장기수들을 찾아다녔고,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정사목위원회에 파견돼 출소자의 집인 '평화의 집'에서 형제들과 함께 살기도 했다. 그러다 2000년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기 위해 수도복을 벗었다. 환속 후 출소자 공동체 '겨자씨의 집'을 만들어 출소자들과 지냈고, 2003년 4월 1일에는 '민들레 국수집'을 열었다.
13년이 흐른 지금 민들레 국수집이 자리 잡고 있는 인천 화수동 고개는 나눔의 홀씨가 퍼져 '민들레 마을'을 이루고 있다. 2013년 어르신 민들레 국수집을 열었고, 2014년에는 필리핀으로 건너가 필리핀 민들레 국수집을 열었다. 13년째 한결같이 매주 토요일부터 수요일까지 민들레 국수집을 운영하고 있으며, 한 달에 두 차례 목요일과 금요일에는 아내와 딸과 함께 전국의 교도소 형제들을 방문한다. 필리핀 민들레 국수집이 문을 연 뒤에는 한 달의 절반은 필리핀에서, 절반은 인천에서 보내고 있다.
기적이란 멀리 있는 무언가가 아니다. 하루에 5백 명 이상의 배고픈 이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민들레 국수집의 하루하루가 그에게는 기적과도 같다. 정부 지원도, 후원 조직도 없는 민들레 국수집은 오로지 착한 마음씨를 가진 개인의 자발적인 후원에 힘입어 운영된다. 보기엔 마치 백조처럼 우아해 보일지 몰라도 쌀이 언제 떨어질지 몰라 마음 졸여야 하는 날들의 연속이다.
그래서 아예 예산 자체가 없지만 희한하게도 있는 것을 다 털어서 아낌없이 손님들에게 내어 주고 나면 더 많은 것, 더 좋은 것으로 채워지는 기적을 체험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경험하는 또 하나의 기적은 희망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였던 노숙인 손님들이 하나둘 재기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가장 배고픈 사람부터 먼저 대접한다
민들레 국수집의 특징은 선착순, 즉 줄의 순서가 아니라 무조건 가장 많이 굶어서 어느 누구보다도 심하게 배고픈 손님부터 대접한다. 사실 노숙자나 사회의 빈곤한 사람, 그리고 사회적 약자들은 모두 세상의 줄서기에서 가장 맨 끝에 있다. 줄 서기 경쟁에서 밀려 뒤로 한참 처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무료급식소의 경우 배식대 앞에 길게 줄 서 있는 광경을 연출한다. 하지만 서 대표의 생각은 달랏다. 줄을 세운다는 것 자체가 제대로 된 사람대접을 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절대로 눈칫밥을 주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햇다. 이들에게는 따뜻하고 자상하게 배려해야 살아갈 힘을 얻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곳을 찾은 손님들은 진수성찬을 바라지도 않는다. 부족해도 정성스러운 마음, 좀 더 잘 대접하려는 마음을 보는 것이다. 배고픈 사람에게 한 손으로 '옜다 먹어라' 하는 대신 두 손으로 그릇을 받쳐 들고 '차린 것이 없지만 맛있게 드십시오' 하면 된다. 이것이 바로 착한 대접이요, 진정한 대접이다.
혼자만 잘 사려는 것 자체가 죄
노숙을 하기까지는 자기 자신이 살아나야 한다고 철석처럼 믿었다. 경쟁만이 살 길이라고 생각했다. 자기가 살기 위해서는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는 아낌없이 없애도 괜찮은 줄 알았다. 그러다가 결국은 혼자가 되어 버린 사람이 노숙을 하는 사람들이다.
'홀로', '혼자' 살던 생활에서 예수님을 중심으로 이웃과 함께,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회개이다. 고개를 돌려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이웃들과 더불어 사는 곳이 바로 꽃자리이다. 자신과 아무런 인연이 없던 사람들이 형제로 보이기 시작할 때 우리는 다시 살 수 있을 것이다. 민들레 식구는 바로 이런 삶을 지향한다.
믿음에 따라 산다는 것, 하느님을 믿고 산다는 것은 자기 혼자가 아니라 이웃과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 삶을 사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시잗되어야 한다. 혼자만 잘 살려는 것 자체가 죄이다. 이런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 욕심이 스스로를 이웃에게서 떨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이럴 때 사람들은 소외와 죽음을 느낀다. 바로 지옥이 시작된다.
누군가 자신의 말을 들어준다는 것
마흔여덟 살인 민제 씨는 이혼한 지 10년이 넘엇고, 노숙생활을 12년째 하고 있는 중이다. 아침 일찍 지하철에서 신문을 줍는 일을 한다. 하루에 육칠천 원 정도 번다. 밥 먹는 것보다 잠을 자는 게 제일 힘이 든다고 한다. 쪽방이라도 마련하려고 돈을 모으고 있지만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 격이다. 그래서 아예 포기해 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독서와 독후감을 발표하는 모임에 참여하면서 그는 눈빛이 밝아졌다. 책을 읽는 것이 어려운 사람은 만화책을 봐도 괜찮다. 시를 한 편 암기해도 3천 원을 지급한다. 서툴지만 우리 손님들이 책을 읽고 말을 하면서 변하기 시작했다. 혼자만의 삶에서 이웃과 더불어 사는 것을 배우기 시작했다.
세상 사람들이 쳐다보지도 않는다며 소외감에 몸서리치던 민들레 손님들이 센터에서 이웃을 만나면서 더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것, 이웃도 있다는 것을 체험한다. 이제는 외롭고 힘들어도 살아갈 희망을 가진다. 하늘의 별만큼, 바다의 모래알만큼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관계없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형제자매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그런 마음을 가진다.
작은 차이가 희망의 씨앗이 된다
2003년 만우절에 민들레 국수집을 연 이래 13년의 세월이 흘렀다. 가난한 사람들은 작은 것에도 행복해한다. 그들은 눈치 보지 않고 밥 한 그릇 먹을 수 있으면 행복해한다. 바라는 것은 소박하게 밥 한 그릇뿐이다. 차이는 있다. '먹어'가 아니라 '드세요'라는 차이이다. 이 작은 차이가 민들레 손님들에겐 희망의 씨앗이 된다.
약육강식의 정글 같은 세상에서 밀려나 거리를 헤매는 이들에게 또다시 경쟁에서 이기는 법을 가르쳐서는 절대로 자활이 되지 않는다. 1등만이 살 수 있는 세상에서 밀려난 사람들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은 가족과 이웃과 친척, 따뜻한 공동체의 체험이다. 남이 나처럼 귀한 사람이라는 것을 체험할 때 이들에게 새로운 삶이 시작될 수 있다. 서 대표는 이 체험을 필리핀의 이웃들과도 나누고 싶었다.
어려운 이웃을 도울 때 우리는 자신이 전지전능한 하느님이라 착각하기가 참 쉽다. 하느님 자리를 우리가 넘보면 안 된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을 의심하면 안 된다. 또 자기 자신은 몸으로 존재하기에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제한적이기에 먼저 주위의 어려운 이웃을 잘 살펴보고 사랑을 즉시 실천하면 좋다. 상대를 바꾸려 들면 안 된다. 스스로 변화할 수 있도록 보조성의 원리를 지켜야 한다.
국은 항상 솥에서 뜨겁게 데워져 있어서 위험하므로 손님이 원하는 만큼 봉사자가 담아 준다. 물도 따라 주고, 식탁도 깨긋하게 닦아 준다. 치아가 부실할 경우 가위로 잘게 썰어 준다. 이처럼 작고 보잘것없는 일들로 민들레 국수집의 하루가 바쁘게 지나간다. 어떤 때는 술 취한 손님의 주정을 들어주느라 진이 빠지기도 한다. 몸은 노곤하지만 마음은 평화롭다. 사랑으로 하는 일은 희생도 아니고 고통도 아니다. 단지 그렇게 보일 뿐이다.
"가진 게 많을수록 세상 살기가 더 어렵다"
우리가 세상을 살기 힘든 이유는 가진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가진 것을 버릴 줄 모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나누지 못할 만큼의 가난은 없다. 행복을 위해 양손 가득 많은 것을 움켜쥘 수도 있지만, 한 손쯤은 남을 위해 비울 줄도 알아야 한다. 나누고 난 빈손엔 더 큰 행복이 채워진다. 세상에서 가장 크고 따뜻한 손은 빈손이다.
봉사는 베푸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것이다. 그런데 봉사를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 베푸는 호의라고 착각한다. 건방지면 절대로 봉사할 수 없다. 예수님은 한평생 나누면서 사셨다. 머리 둘 곳조차 없이 노숙을 하시면서도 나누면서 사셨다. 무엇을 나누셨는가 하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는 그 행복을 나누셨다. 자발적인 나눔으로 부자도 가난한 사람의 행복에 끼어들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밥이 지겨우니 국수 좀 주세요"하는 날까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는 삶이 고달픈 이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런데 이들을 도울 수 있는 일은 너무나도 보잘것없는 일뿐이다. 민들레 국수집은 배고픈 사람들에게 겨우 일주일에 닷새 동안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문을 열고 밥을 나눠준다. 조금씩 나누면서 더불어 사는 것, 배고픔을 함께 나누면서 사는 것이 전부지만 말이다.
힘든 일이 있어도 서로 먼저 배려하고, 서로 먼저 격려하며 함께 살아요, 우리. 함께 나누어요, 우리. - 이해인, 여는 시 '함께 가요, 우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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