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국수
 


 
작성일 : 06-11-16 12:27
도로시와 가톨릭 일꾼 운동
 글쓴이 : 서영남
조회 : 8,262  
도로시와 가톨릭일꾼운동

평화와 정의 운동의 뿌리를 추적할 때마다 당신은 항상

가톨릭일꾼운동으로 돌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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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도로시 데이와 그가 공동 창설했던 가톨릭일꾼운동에 대한 배경을 설명하겠다. 1897년 11월 8일 한 신문인 가족에서 태어난 도로시는 어린 시절에 자주 옮겨 다녔고, 뉴욕에서 2년 동안 보헤미안 생활을 한 후 일리노이 대학을 중도에 그만 두었다. 그는 점점 저술과 행동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여성의 참정권획득을 위해 일하면서 시민불복종운동으로 수차례 투옥되면서 사회운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신비스러운 계기로 인해 가톨릭에 이끌리게 되었고, 맨하튼 저 지역에 흩어져 있던 이민자들의 교회를 자주 찾아갔다. 수년 동안 그는 포스트 배터함과 스테이튼 섬에서 “관습법에 의한 결혼”생활을 행복하게 즐겼으나, 그들의 딸, 타말이 태어난 후 도로시가 로마 가톨릭이 되기로 결정함에 따라 관계가 끊어졌고, 도로시는 이후 죽을 때까지 독신으로 살았다.

그리스도교의 원칙들이 사회적 경제적 불의에 대해 행동할 수 있는 길들을 모색하면서, 도로시는 피터 모린을 만났다. 피터는 말이 많고 박식한 불란서인 농부로서 도로시에게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들을 소개해 주었다. 피터의 절대적인 세 가지 프로그램들은 충분한 정보에 의한 사회적 비판주의, 집 없는 이들을 위한 환대의 집 그리고 실업자들이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공동농장이었다. 1933년 5월 1일 유니온광장에서, 그들은 가톨릭일꾼신문 창간호를 배포하였고, 이어 일꾼운동이 탄생되었다. 아직껏 전 세계에 배포되고 있는 가톨릭일꾼 신문은 현대의 사회문제들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응답들을 제시하고, 데이와 피터의 계획에 응답하여 생겨난 수많은 환대의 집들과 공동농장들을 격려한다.

운동의 초기에 데이와 모린은 불굴의 투지를 갖고 전국을 여행했으며, 가톨릭일꾼공동체들을 방문하고 대학과 교회 등 청중이 모이는 곳이면 어느 곳에서나 강연했다. 이러한 청중들은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의 그림자가 미국 전체를 덮을 때 사라져갔다. 데이의 타협하지 않는 평화주의는 처음엔 스페인 내란에 대한 응답으로 표현되었고, 전체주의에 대해 전국적으로 방어태세에 돌입한 미국이 이러한 데이의 주장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던 상황이었다. 전쟁이 선포되자 데이의 글 제목은, “우리는 우리의 평화주의적 입장을 고수한다”였다. 전투 대신, 도로시는 기도, 단식, 자선 그리고 전쟁 산업에 불참하기를 촉구했으며, 그의 입장을 지지해주는 신약성서와 초기 교부들의 말을 인용하였다.

평화주의의 입장은 일꾼운동 내에 깊은 갈등을 일으켰고, 신문 발행부수는 급격히 추락했으며, 전쟁이 끝날 무렵 환대의 집수는 크게 줄어들어 35개 정도에서 열 집이 안 될 정도였다. 데이는 히로시마와 나가사끼 폭격에 슬픔과 충격을 받았고 다른 신문들이 승전을 보도한데 대하여 강력하게 항의하는 글을 썼다. 그는 “모든 법칙들을 무너뜨렸으니,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울며 속죄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데이의 철저한 비폭력에 대한 결단은 냉전시기에도 계속되었다. 그는 1948년 12월호 가톨릭일꾼신문에 이런 글을 썼다. “형제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발적 가난, 스스로 헐벗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다른 이들을 착취함으로써 제조되는 안락함과 사치에 참여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직업이 공동선에 기여하지 않는다면, 하느님께 그 일을 포기하는 은총을 청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 전쟁 후 물질주의를 겨냥하는 미국과 러시아의 새로운 적을 향하여 강력한 주장을 선언한 것이다.

1950년대에 가톨릭일꾼에 왔던 톰 코넬에 의하면, 도로시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세상의 가장 연약한 사람들에 대한 깊은 결단은, 가톨릭일꾼운동이 다른 소그룹 그리스도교 평화운동과 함께 사회의 주변부 가장자리에 존재하고 있었을 이 고립된 시기에 자라났다. 그 후 베트남 반전 평화운동이 일어나자, 가톨릭일꾼운동 역시 그 수량과 영향력이 다시 커지기 시작했다. 1960년대에 데이와 다른 일꾼들은 전쟁에 반대하는 운동을 가장 강력하게 주도해가는 목소리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이때 이상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은 뉴욕 환대의 집에 몰려들거나 독자적으로 환대의 집을 시작하기도 하였다. 그곳에서 젊은이들은 전쟁 징집서를 찢어 버리고, 굶주린 이들을 먹이며 비폭력저항 행위를 적극적으로 수행하였다. 데이는 가톨릭평화연대의 창설자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이 그룹은 화해연대와 제휴하는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도로시는 후에 팍스 크리스티가 된 한 조직의 대모역할도 했다. 징집서를 태우고 관련문건을 파괴한 혐의로 수명의 가톨릭일꾼들이 감옥에 갔다. 데이는 이들 모두를 지지하였고, 때때로 그들이 하는 저항의 본질에 대하여 우려를 표명하기도 했다. 데이는 계속하여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로마 등을 순방하였고 기도와 단식을 하며 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한 주교들이 그들의 마지막 문서인 ‘현대세계의 사목헌장’(기쁨과 슬픔)에서 복음적 비폭력을 옹호하며, 핵전쟁을 단죄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쁨에 떨기도 했다. 후에 핵무기에 관한 미국 주교회의의 서한은 데이의 심오한 영향에 대해 언급했고, 평화조성운동이 미국의 로마 가톨릭인들의 신앙에 필수적 요소임을 선언하였다.

60년대가 끝나갈 무렵, 가톨릭 일꾼들은 환대의 집에 오는 손님들이(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베트남 전쟁에 참가했던 군인들이었다)보여주는 정신병 증세, 중독, 두려움, 분노와 대면하며 매일 환대를 실천하면서 비폭력의 원칙을 점점 더 증언하도록 초대되었다. 비폭력의 원칙들을 배워가는 과정은 매일 대부분의 환대의 집에서 계속되었는데, 가톨릭일꾼들이 비폭력을 사회정치 변화를 위한 하나의 전략으로, 또한 온전한 생활방식으로 실천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었다. 1970년대에 도로시 데이는 병으로 점점 약화되어 갔으나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는 스테이튼 섬의 해변가 한 작은 오두막집에 머물거나, 허드슨 강가의 가톨릭일꾼농장(모든 사람들이 티볼리라고 부른), 뉴욕의 동부 저지역에 있는 요셉의 집과 근처에 있는 매리 하우스(집 없는 여성들을 위한 큰 환대의 집)에 머물렀다. 그때까지도 데이는 간간히 여행했고, 1976년 세계성체대회에서 마지막 강연을 했다. 그는 1972년 노틀담 대학에서 수여한 라테레 메달을 받았고 수개의 다른 중요한 상을 받았으며, 그의 행적에 대한 공적인 인정을 받을 때까지 살았다.

그가 죽었을 때, 가톨릭일꾼운동에는 80개의 환대의 집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운동의 쇠퇴를 예견했으나, 신문 편집자였던 페기 쉬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도로시를 잃었을지 모르나 아직도 복음을 가지고 있다.” 운동은 계속하여 자라고 있다. 오늘날 약 180개의 가톨릭일꾼공동체가 있으며, 오스트리아, 뉴질랜드, 독일과 영국에 퍼져있다. 환대의 집에서 복음은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지역의 상황에 따라 좌우된다. 어떤 집들은 에이즈의 희생자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으며, 어떤 집들은 불법이민자들, 또 어떤 환대의 집은 여성들과 아이들을 돌본다. 어떤 집은 큰 무료급식소를 운영하고 다른 집들은 피터 모린의 푸른 혁명을 실천하기 위하여 농장을 운영한다. 모습이나 강조점에 차이가 있어도, 모든 가톨릭일꾼들은 그리스도교적 평화조성에 대한 결단 속에 일치하고 있으며, 많은 이들은 연방세 납부를 직접 거부하거나 최하위의 가난을 살아감으로써 그 결단을 실천한다.

도로시 데이의 삶과 일, 그리고 저술은 또한 자신들을 가톨릭일꾼이라고 부르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이어져간다. 고 마이클 해링톤은 데이가 아마도 미국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가톨릭 평신도일 것이라고 나에게 말한 적이 있다. 시카고의 첫 번째 가톨릭일꾼 환대의 집을 창설한 사람들 중의 하나인 에드 마르시니아크는, 도로시와 일꾼운동의 영향은 단순히 도시 안에 퍼져있는 작은 일꾼집들에만 그치지 않고, 다른 그룹들과 많은 주류교회들에 의해 포용되고 변형되어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표현한다. 에드는 이렇게 말한다, “가톨릭일꾼운동은 더 이상 고립된 게임이 아니다.” 많은 평신도 종교공동체들과 그리스도교 평화그룹들은 전 세계에서 전쟁과 가난의 연결을 지적하며 그것들을 없애기 위하여 일하고 있다. 그들은 도로시 데이의 메시지를 듣는다-하느님께 대한 충실함, 가난하고 빼앗긴 이들 속에서 살아가며 현대생활의 물질주의에 철저하게 반대 입장을 택하고, 영적인 생활과 비폭력의 분명한 연결을 보여주는 것이다.



송경모 09-11-06 15:10
 
하느님의 대사들로 민들레 국수집에 온 VIP손님들! 그들의 작은 꿈이 이루어지는 그날까지 기도하겠습니다.
지승현 09-06-09 17:26
 
도로시를 꼭 닮은 우리의 수사님!! 곧 오픈하는 '민들레 희망지원센터' 기대하겠습니다~
알라딘 09-02-15 14:50
 
민들레 국수집을 통해 희망을 품습니다. 따뜻한 나눔이 널리 널리 퍼졌으면 좋겠습니다. 국수집을 통해서 많은 위안과 행복을 얻습니다.
장미 08-12-20 19:34
 
민들레 국수집 안에서 쉽게 풀어주신 복음 말씀을 매일 읽으면서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요셉 08-09-10 16:27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한 수사님의 헌신적 사랑과 봉사의 마음이 곳곳에서 향기처럼 베어납니다. 도로시 데이의 삶과 수사님의 삶이 다를바 없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