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늦은 여름 어느 날에 대한 기억입니다.
미국 뉴저지 주 뉴톤 타운의 성 베네딕도회 성 바오로 수도원 경내에서 가졌던 명상에 대한 회상입니다. 그 지역에서는 가장 높은 위치에 백조가 사는 호수가 하나 있습니다. 그 샘솟는 호수의 물은 동서로 흘러나갑니다. 서쪽으로 흘러나가는 물줄기는 두어 시간을 흘러서 펜실베이니아와 뉴저지의 경계선인 델라웨어 강에 이르게 됩니다. 호수로 가는 길을 따라 걷다가 첫 번째 갈림길에서 왼쪽옆길로 들어서서 얼마간 걷다보면 숲속 양지바른 곳에 위치한 수도원 공동묘지에 가 닿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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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과 바람, 물과 불, 대자연의 길로 육신을 되돌려주고 자유로운 영혼의 존재로 영원한 안식을 누리실 분들에 대한 기억들이 일어나는 곳이 묘지이기도 합니다. 친밀함과 편안함이 있는 그 수도원 공동묘지에서 비문들에 새겨진 내용들을 살핍니다. 다시 머물 수 없는 순간의 인연으로 기억 속에 있는 한 분을 찾아 만납니다. 시공(時空)을 넘나드는 아주 특별한 인연(因緣)의 사람들 중에 한 분인 마리너스 레너드 라루 수사입니다(Bro. Marinus L. Larue, O.S.B., 1914. 1. 14~2001. 10. 14).

마리너스 레너드 라루 수사는 6.25 한국전쟁 당시 일만 톤급의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 호(Meredith Victory)의 선장인 레너드 라루(Leonard Larue)입니다.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한국 전쟁 중에 군수물자를 실어 나르던 비무장 화물선인데, 레너드 라루는 1950년 7월 28일부터 1952년 6월 7일까지 이 배의 선장으로 봉직합니다.

1950년 겨울,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아군(我軍)에게 불리해집니다. 성탄을 며칠 앞두고 흥남부두에서 미군의 대대적인 후퇴작전이 이루어집니다. 그 작전에 투입되었던 함선들 중에 하나가 레너드 라루 선장이 지휘하던 메러디스 빅토리 호입니다. 위급한 상황에서 그냥 떠나가려던 라루 선장은 뱃머리를 항구로 되돌려서 피난민들을 자기 배에 태울 수 있는 데까지 태우게 합니다. “저는 쌍안경으로 해변을 살폈는데 처참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 북한 피난민들이 선창에 떼를 지어 있었습니다. … 그들 옆에는 놀란 병아리들처럼 그들의 아이들이 있었습니다”라고 훗날 그는 증언합니다.

공습이 흥남부두를 향하고 있던 그날은 1950년 12월 22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라루 선장은 “눈에 보이는 사람은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배에 태워라”고 명령합니다. 쏟아지는 적의 포화 가운데 마지막 피난민이 승선할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리하여 14,000명을 구합니다. 인류역사상 오늘날까지 단 한 번에 가장 많은 사람을 구조한 유일무이한 사건으로 기록되었고 기억됩니다.

당시 일만 톤급의 메러디스 빅토리 호에는 300톤이나 되는 제트 연료가 실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흥남 바다에는 수중폭탄들이 설치되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만일 수중폭탄과 부딪친다면 배는 한순간에 불바다가 되어, 타고 있던 모든 사람이 죽게 되는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메르디스 빅토리오 호는 단 한 사람의 희생자도 없이 무사히 흥남 부두를 탈출합니다. 동해바다를 이틀 동안 항해하여 성탄 전날 밤에 부산 앞바다에 이릅니다. 그러나 피난민을 더 이상 받을 수 없다는 소식에 부산항을 지나서 거제항으로 이동하여 입항하고 피난민을 내립니다.

훗날 마리너스 라루 수사는 그 항해를 회상하면서 하느님이 직접 배를 인도하시는 듯했던 체험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저는 때때로 그 항해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작은 배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태울 수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한 사람도 잃지 않고 그 끝없는 위험들을 극복할 수 있었는지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 해 크리스마스에 황량하고 차가운 한국의 바다 위에서 하느님의 손길이 제 배의 키를 잡고 계셨다는 명확하고 틀림없는 메시지가 저에게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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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너드 라루는 한국 전쟁이 끝난 후 메러디스 빅토리 호(Meredith Victory)의 선장을 그만 둡니다. 바다생활 22년 후인 1954년 뉴저지 주의 뉴톤에 있는 베네딕도 수도회 중 하나인 성 바오로 수도원(St. Paul's Abbey)에, 즉 뉴톤수도원에 입회합니다. ‘마리너스’라는 수도명(修道名)을 받은 마리너스 라루 수사는 1956년 12월 25일에 수도서원을 하게 되고, 2001년 10월 14일에 일생을 마칠 때까지 47년간 수도원에서 베네딕도회 수도자로 여생을 살게 됩니다. 수도원에 들어간 그는 자신의 변신에 대하여 질문을 받을 때면 트라피스트회의 라파엘 시몬 신부님의 글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간결한 말로 응답하기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가장 위대한 로맨스이다.’ ‘하느님을 추구하는 것은 가장 위대한 모험이다.’ ‘하느님을 만나는 것은 인간의 가장 위대한 성취이다.’”

그는 자신이 성 베네딕도회의 수도자로 사는 중에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됩니다.
북한에서도 성 베네딕도회의 수도자들이 선교활동을 했다는 것과 6.25전쟁을 전후하여 북한에서 수십 명에 달하는 사제들과 수도자들이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순교를 당했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리고 1950년 겨울 흥남부두에서 메러디스 빅토리 호를 타고 온 피난민들 중에 훗날 수녀들과 신부들이 나왔다는 소식을 살아생전에 듣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제들 중에 한 사람은 바로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의 수도자라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마리너스 라루 수사는 노년에 자신이 소속된 뉴톤수도원에 수십 년간 새로운 성소자가 없고 남은 수도자들도 고령이 되어 공동체가 어렵게 된 현실적인 문제로 병상에서 마음 아파합니다. 그러는 중에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의 젊은 수도자들이 뉴톤수도원으로 파견된다는 역사적인 결정이 2001년 10월 12일에 있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됩니다. 그는 평생을 몸담아온 수도원 공동체가 새로운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는 소식을 마음에 품고 그해 10월 14일에 선종하여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갑니다.

오늘도 일상적으로 그 숲속 어딘가에는 검은 곰들이 어슬렁거리고, 그 숲속의 호수에서는 백조들이 호반에 물길을 내며 노닐고 있을 것입니다. 그 호수 옆으로 잘 가꾸어진 수 만평에 이르는 캠프장에서는 젊은이들이 새로운 세계를 꿈꾸며 뛰놀 것입니다. 올해도 12월이면 크리스마스트리 생산지로 잘 알려진 뉴톤수도원에는 크리스마스트리를 구하기 위해 가족단위로 찾아오는 방문객들이 많을 것입니다. 콜로라도 스프루스(Colorado Spruce), 더글러스 펄(Douglas Fir) 그리고 소나무과의 2종류 등등 여섯 종류의 크리스마스트리용 묘목 사만 수천 그루들을 그려봅니다.

성탄을 기다리는 초록빛 들판의 청푸른 기운이 그립습니다. 가족들의 취향에 따라 각기 독특한 향을 지닌 크리스마스트리를 선택하듯이 시공을 넘나드는 아주 특별한 인연들이 아름다운 향기로 피어나는 우리네 삶이었으면 합니다. 밤하늘의 은하수 같은 무수한 인생들과 삼라만상이 다 소중하고 고마운 인연으로 저마다의 향기를 피어냈으면 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새로운 때가 되어 일어날 씨줄과 날줄 같은 만남으로 다시 깨어나게 하는 아주 특별한 너와 나의 인연을 묵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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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 김종필 신부
(뽈리까르뽀,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원장, 한국가톨릭문화연구소의 ‘聖母茶山茶會’ 지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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