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국수
 


 
작성일 : 07-07-14 19:38
환대와 인격주의
 글쓴이 : 서영남
조회 : 6,432  

환대와 인격주의

-가톨릭 일꾼 신문에서-

마르꼬?루이즈 즈위크 부부


? 그건 아주 긴장된 상황이었다. 어떤 그룹에서도 그런 상황에 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그룹의 사람들은 모두 교회활동에 적극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몹시 화가 나 있었다. 어떤 환대의 집에서 위험한 처지에 놓여있는 한 매맞은 여인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의 문의에 즉각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그 여인이 그대로 돌려보내졌기 때문이었다.

? 그들은 교회 돈을 받고 성서적인 신앙 때문에 사람들을 돕는 일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도 이 위험에 처한 여인을 한시간이나 하루밤 정도 자기집에 데려다가 묵게할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말이다. 아니면 임시로 교회나 사무실, 여관방에 묵게하고 다음날 조처를 취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 그런데 그들이 취했던 태도는 소위 전문기관의 전문적이고 기계적인 태도에 그치고 말았다. “우린 그런 경우를 취급하지 않습니다.” 혹은 “그런 일을 하도록 허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든가 “5시 이후에는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등으로 대답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런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했던가? 예수가 그런 말을 했던가? 성서가 그렇게 말했던가?

? “그러나 당신은 우리가 목사나 신부 혹은 수녀나 성인, 마더 데레사가 되기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모든 권한은 신부들이나 수녀들이 갖고 있어요.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투신할 권리도 없어요.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할 권한도 없는 셈입니다. 우리는 정해진 일 이외에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없습니다. 우린 그저 평신도일 따름이니까요.”

? 이런 태도는 역(逆)성직주의 같은 이상한 태도이지 않을까? 우리 자신과 우리 계획, 우리의 개인생활 그리고 가진 것이 별로 없고 많은 고통을 겪어야 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우리의 특권만 지키려고 쓰는 것이 아닐까? 편안하게 살고 싶은 우리의 권리를 보호하려는 자세가 아닐까?

? 사회봉사분야나 공동체를 운영하는 사람들, 변호사들, 교사들, 의사들, 간호원 등 사람들을 돕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전문기관이나 단체들, 또한 그들의 사람들을 돕는 경직되고 단선적인 방식을 취하고 싶을지 모르겠다. 불행하게도 이런 방식은 사람들을 돕기보다 자주 사람들이나 그룹들을 지배하는 결과가 된다.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고 싶은 평신도들이 처하는 진짜 위험은 전문주의의 정해진 틀을 따를 때 일어날 수 있는 탈선이다.

? 성서에 나타나는 응답은 다른 것이다. 성서의 응답은 전문주의적인 응답이 아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의 근거가 신앙이라면, 신앙이 우리의 행동을 뒷받침하고 보증해주고 있다면 우리는 사랑, 봉사 그리고 권력의 문제에 대하여 사회사업가나 변호사 혹은 공동체 실무자의 차원보다 훨씬 더 깊은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것이다.

? 리챠드 로어 신부는(프란치스꼬회)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 있어 사랑과 권력의 관계를 파헤치고 있다. 우리가 복음을 읽을 때 사랑과 권력간에 어떻게 균형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라는 질문을 로어 신부는 던지고 있다. 사랑은, 성서적 정의에 의하면(요한 15,21) 예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며, “좋은 일을 한다”는 따스한 느낌이 아닌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섬기라는 예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한 마일을 더 가주고, 외투를 달라하면 주고, 다른 뺨을 내놓고, 적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며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힘껏 특히 하늘에 계신 그분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 로어 신부에 의하면, 권력과 사랑은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보통 상식적인 형태의 권력을 버릴때까지(그리스도인들이 회심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 버리는 행위이다) 사랑의 신비스러운 사건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권력은 지배와 똑같은 것이다.? 내 식대로 일이 되어지는 것을 봐야 한다고 했을 때 나는 아마도? 사건에 애하여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경우가 반드시 권력의 전체 의미를 다?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없다.? 루가 사도는 하느님 자신을 주는 선물이, 즉 성령이 "힘(권력)"의 선물이라고 묘사한다.? 성령이 우리에게 올 때 우리는 힘을 받게 되는 것이다(사도행전 1,8; 루가 1,35; 24,49).?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권력에 대하여 그처럼 사랑-증오의 관계를 갖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만일 하느님이 권력을 주신다면 분명히 권력은 좋은 것임에 틀림없다.? 나는 우리가 권력을 제대로 신뢰하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의 보다 긴 길을 선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참다운 영적 힘을 얻기 위하여 권력을(사막에서 사탄에게 겪은 세 가지 유혹) 이겨내는 운동을 거의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는 지배와 억제를 잘못된 권력의?형태라고 규정한다. “이 세상의 왕들은 강제로 백성을 다스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된다”(루가 22,25-26). 예수께서 신뢰를 두었고 제시하였던 권력은 무력한 이들의 고통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오는 힘, 우리가 전혀 지배할 수 없을 때 발견되는 힘을 말한다.

? 우리가 참다운 힘, 즉 복음의 힘을 깨닫고 즐기게 되면, 맹목적인 지배는 가짜이고 불쾌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 전문주의란 또다른 관점에서 보면 지배, 조정을 의미한다. 우리 자신의 삶들을 지배하는 것이다. 특히 우리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는 것이고 따라서 그들이 우리의 편안한 삶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전문주의의 추한 모습은 외모를 강조함으로써 부상한다. 예를들어 전문주의는 훌륭한 건물, 복잡한 구조의 건물을 의미한다. 좋은 건물이 있으면 그에 따라 더 많은 기금을 얻게 될 기회가 많다. 혹은 전문주의란 가구, 벽에 걸린 장신구, 카펫, 접수대, 비서들, 직함 등을 의미한다.

? 전문주의란, 더 발전할수록 더 많은 보수를 받게 되고, 우리가 섬기려는 사람들로부터 더 멀어지는 것을 의미하며, 그들에게 하는 직접적인 섬김을 오히려 아마츄어들에게 맡겨버리는 것이다. 전문주의는 규칙을 의미하며, 그 규칙은 문제가 되는 경우들은 점점 줄이고 근무시간 이외의 일이라는 위험을 없애버리는 역할을 한다. “우리는 이 일을 할 수 없게 되어 있어요!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 가톨릭일꾼운동의 환대의 집들도 이와 똑같은 문제들과 싸워야 한다. 어떤 이들은 아주 제한된 인원의 사람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전문주의나 기관이 쓰는 방법을 사용한다. 또 어떤 이들은 기분의 언짢으면 아예 사람들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이런 방식이 필요한 때도 물론 간혹 있다. 그러나 예수의 말씀과 명령을 지키는 모범을 찾아볼 수는 없을까? 철저한 그리스도교적 봉사를 하고 있는 유형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 피터 모린과 도로시 데이의 전문주의는 현재의 전문주의와 얼마나 다른 것인가! 그들은 개인 차원의 혁명, 재림의 혁명을 믿었다. 도로시 데이가 실천에 옮겼던 피터 모린의 철학, 가톨릭일꾼운동의 실무자들이 한 세대, 혹은 두 세대 때에 실천하였던 그의 철학은 다음과 같다. “다른 친구가 그렇게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바를 당신 스스로가 그렇게 되어 보십시오. 아직 되어지지 않은 일에 대하여 비난하지 마십시오.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찾아보고 하십시오. 모두가 조금씩 덜 가져가십시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더 가질 수 있도록. 각자가 모든 사람의 하인이 되고 마지막 자리를 차지하십시오.”

? 도로시 데이는 처음부터 국가에 손을 벌려서는 안된다고 강조하였다. “모든 다른 방법들이 실패했을 때, 가지고 있는 자원, 본당의 자원, 교회의 자원이 다 사라졌을 때 그때에는 국가에 도움을 청할 수 있습니다. 본당과 조합, 그룹들은 상호협력을 위해 한데 모여야 하고 비슷한 단체들이 함께 행동한다면 도시나 국가의 성가시고 기계적인 방법보다 훨씬 더 효과적일 것입니다.” 피터 모린도 역시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 하며, 자발적 가난과 금욕주의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가난을 끌어안지 않고서는 참다운 신앙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 그러나 개인주의(인격주의)적 관점에서 응답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기피하는 우리 자신의 게으름이나 기관주의를 벗어나는 것은 항상 수월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쉽게 합법주의, 기관주의 그리고 권력의 체제에 기울어진다. 개인으로서 그룹으로서 공동체로서 우리에게 일어났거나 이미 일어나고 있는 이런 성향을 분별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 로어 신부가 우리에게 상기해주는 것처럼, 콘스탄틴 황제가 AD 313년에 우리를 권력자의 계층에 초대한 이후로 그리스도교는 관료주의, 가짜권력, 지배층과의 타협, 기관주의, 특권을 보호해주는 정부나 기관에 대한 지지, 그리고 교회를 위하여 대신 지배작업을 해주고 있는 경찰 등의 문제들을 알아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다른 방식으로 하라고 말씀하신 예수-선생님의 이름으로 합니다”라고 해왔다.

? 그러나 교계에 있는 모든 악을 비난함으로써 교회의 지도력에 채찍질을 계속 가하는 대신, 우리는 교회의 본래 의미를, 총괄적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 전체 교회는 지도자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로 구성된다. 우리는 다양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역할들을 허위의 성직주의에 따라 편협하게 제한시키지 말아야 한다. 많은 교회 사람들은 이미 가난한 이들에 대한 선택을 하였고 복음의 사랑과 힘을 끄집어내는 일에 참여하고 있다.

? 어떤 신부는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가 됨으로써 비참에서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가능한 인류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함으로써 해방된다고 말한다. 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불의의 희생자들과 연대하기 위하여 가난이라는 스캔들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있다. 이러한 증언의 삶들은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부와 권력 그리고 명예에 바탕을 두는 기존의 사회적인 용납이라는 규범에 도전하는 것이다. 이런 증언은 복음과 교회 가르침의 가장 강력한 선포이다. 만일 교회가 스승을 충실하게 증언한다면 세계의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과 일치해야 한다. 만일 가톨릭이 부자들과 일치한다면, 안정되고 권력이 있는 사람들과만 어울린다면 그들은 말로 선포하는 복음을 그들의 삶으로써 배반하는 것이 될 것이다.

? 가톨릭과 또다른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성체 속에 현존한다는 것은 쉽게 믿는다. 이제 우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가 우리 이웃 안에도 계시다는 사실을 쉽게 믿을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아내야 하다. 그것은 실제로 다른 형태의 현존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중요한 상징적 개념이다. 성체 안의 참 현존의 가르침을 수용하는 사람들은 또한 이웃 안에 계시는 예수를 보아야 한다는 가르침도 수용할 수 있다. 그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깊은 신앙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나 그분은 우리가 가진?모든 것을 한꺼번에 팔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조금씩 조금씩 재림을 기다리면서 팔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어느 곳에선가 우리가 이 내놓는 작업을 시작하기를 바라신다.? 어떤 형태로든지 신앙의 도약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다른 투자처럼 우리는 우리가 씨뿌린 것을 거두게 될 것이다(혹은 어떤 때는 우리가 씨뿌려 놓은 것을 다른 사람이 거둘 것이다)? 그렇지만 그 상은 엄청난 것이다.??그러니 지금 바로 시작해 보자! (가톨릭 일꾼 신문 1994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