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심이 그리 깊지 못한 나는 주일미사를 ‘의무감’ 비슷한 심정으로 나가며 성당의 소식들은 주로 주보(週報)를 통해 알게 된다. 주보에는 행사안내는 물론, 새겨둘만한 문구들이 실려 있어 유심히 읽어본다. 엊그제는 주보에 인상 깊은 안내문이 있었다. “가정생활에 도움이 필요하신 분은 성당사무실에서 ‘쌀 상품권’을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아무런 (개인)정보와 사유를 남기지 않고 상품권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짤막한 안내문이었지만 소중한 의미가 담겨있다고 생각됐다. 누군가 양식이 필요한 사람은 쌀(상품권)을 가져가되 창피해하거나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아무 조건을 달지 않은 배려가 돋보였던 것이다. 요즘 세상에 쌀이 없어 배를 곯는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실제로는 많이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자존심 강한 한인들이 남의 도움을 받는 것은 나름대로 용기가 필요하다. 이를 배려한 마음씨가 아름다워 보였다. 평소 말없이 선행을 실천하는 주임신부님의 뜻이 담겨 있을 것으로 생각됐다.
연말이 되니 곳곳에서 불우이웃돕기가 펼쳐지고 있다. 그러나 개중에는 생색내기용으로 치러지는 행사가 적지 않다. ‘악어의 눈물’ 같은 금액을 내고 사진이나 찍으려는 사람도 많다. 물론, 언론에서 굳이 기부자의 사진을 내는 의미도 있긴 하다. 캠페인을 좀더 확산시키기 위한 의도인 것이다. 최근 노인회관에 대한 모금운동이 그런 종류다.
그러나 공개적인 모금운동 외에 개인적 선행은 조용하고 차분하게 이뤄져야 할 것이다. 티내지 말고 산타할아버지처럼 소리 소문 없이 행해져야 한다. 기부는 주는 사람의 정성도 중요하지만 받는 사람의 처지도 생각해야 한다. 오죽하면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가, 라는 자책감에 움츠러들 마음도 헤아려야겠다. 그런 뜻에서 성당의 조건 없는 쌀 나누기 사례는 좋은 본보기다.
성경에서도 일렀다. “칭찬 받으려고 남들이 보는 앞에서 선행을 베푸는 일이 없도록 하라.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아무 상도 얻지 못하리라... 친절을 베풀 때는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하라.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아 주리라.”(마태복음 6장)
최근 한국 인천에서는 노숙자들을 위한 어느 무료식당에서 배고픈 이들을 위해 아무 조건 없이 식사봉사를 해주고 있어 많은 이들을 감동시키고 있다. 이곳은 다른 무료급식소와 달리 배식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아 아무 때고 들러 밥을 먹을 수 있다. 배고픈 사람이 오면 어느 때라도 기꺼이 상을 차린다. 천주교 수사(修士)출신인 주인의 대답이 짠하다. “대부분의 급식소는 배식시간이 제한돼 있어 노숙자들이 긴 줄을 서야한다. 사회의 경쟁에서 밀리고 밀린 사람들이 여기서까지 '줄서기 경쟁'에 시달리게 하고 싶지는 않다.”
누구나 양껏 먹을 수 있도록 식사도 뷔페식이다. ‘손님’들이 눈치 보지 않도록 배려하는 마음인 것이다. 하루에 몇 번씩 와도 환영이다. 이 ‘민들레국수집’에는 하루 300~400명의 ‘손님’이 찾아온다. 사업에 실패해 노숙생활을 하는 이, 알코올 중독에 빠진 이, 교도소를 제집 드나들듯 하는 이 등 사연도 다양하다. 요즘 같은 불경기엔 많은 이들이 그런 환경에 처할 수 있기에 이 급식소가 더 관심을 끄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줄인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인터넷을 들여다보시기 바란다.
올 한해는 경기침체로 많은 고생들을 겪었다. 자선기부로 유명한 캐나다에서도 불황의 여파로 15년 만에 처음으로 기부총액이 감소세로 돌아섰다. 반면, 노숙자 등을 위한 무료급식소(food bank) 이용자는 급격히 늘었다. 이처럼 어려울 때일수록 서로 함께 나누는 삶이 더욱 값지지 않겠나. 조용히 우리 이웃들을 돌아보자.(이용우 joseph@joongangcanada.com)